교회소식
| 학력 |
• 총회신학대학졸 (B.Th.)
• 총회신학연구원 (M.Div.)
• 이스턴칼리지 (B.A.)
• 웨스트민스터신학교 (M.A.R. & D.Min.)

| 경력 |
• 서울 후암제일교회 담임목사
• 필라 영생장로교회 담임목사 (1980이래)

이용걸 목사는 조국 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4일, 아버지 이 봉삼 씨와 어머니 우 영주 권사 사이에서 2남 3녀중 막내로 중국 청도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 외할머니, 친할머니 세분은 교회를 열심히 섬기던 분들이라 이목사는 모태 신앙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다. 이목사는 출생한지 3일만에 부모의 품에 안겨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서울과 대구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어 가난 속에서 고학을 하며 자라났다.

12살 되던 해 이용걸 소년은 의사도 못 고치는 중병에 걸렸다. 처음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점차 그 증상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근육에 심한 통증이 있기에 유심히 흝어보앗더니 살 자체가 곪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 병원 저 병원, 용하다는 한의원 등을 다 찾아가 보았으나 병은 낫기는커녕 더 깊어만 갔다. 한때는 수술대에 누워서 수술을 했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집도한 의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살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한 병입니다. 살 자체가 곪는 것인데 만약 이것이 뱃속으로 번지면 잘라 내어야 하고 생명에 위협을 주게 됩니다.” 의사의 치료 불능의 선고를 받았을 때, 우 권사는 병원문을 나서면서 아들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자. 하나님은 궁지에서 은총을 주시며 역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란다.” 이런 어머니의 말에 아들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급히 상경했다. 변계단 권사의 기도처로 찾아간 것이다. 모자는 권사의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1년간 숙소를 용산에 있는 친척집에 정하고 모자는 1년을 하루같이 변 권사의 기도처로 찾아가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 사이 소년은 몇 차례나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위험한 지경에서도 약 한 첩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로 매달렸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다.” 이런 확신의 기도로 부르짖다가 어느 날 소년은 심한 통증 가운데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에게 크신 은총을 내리사 제 병을 고쳐 주옵소서. 건강을 주시면 주님을 위해 평생을 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고통에서 속히 생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서원기도로 하나님께 혼신을 다짐했던 그는 기도를 받던 중에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였다. 365일을 기도하던 중 마지막 날인 10월 15일이었다. 그날 오후 그는 기도 받을 차례가 되어 변권사 앞으로 다가갔다. 변권사의 안수기도 중 그는 전신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짐이 느껴졌다. 성령의 불이 내린 것이다.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겉옷과 속옷까지 벗어 던졌다. 순간 통증이 사라지고 건강이 회복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그는 막노동까지 하며 공부를 했다. 그는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배움에 전력을 다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다른 학생들 하고는 다르게 생활했다. 다른 학생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학교에 다닐 때 그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늘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총회신학대학과 총회신학연구원에서 7년간 공부하고 졸업한 그는 31세 때 서울 후암제일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당시 후암제일교회는 이학인 목사가 개척한 교회로 23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서울에서도 좋은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학인 목사의 은퇴 후 후임자 선택으로 1년간 곤혹을 치르는 와중에서 교회가 분열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중에 남은 교인은 장년 80명 정도였으나, 이용걸 목사의 부임 후 교인이 점점 증가하여 5년 후에는 장년 출석이 750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후임제일교회는 다시 서울 장안에서 소문난 교회가 되었다.

이용걸 목사는 서울 후암제일교회 강도사 시절, 전은애 사모를 만나 76년 9월 14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목사의 신앙 가계가 친할머니, 외할머니로부터 3대에 이어짐과 같이, 처가의 신앙배경 역시 만만치 않다. 장인이 유명한 전관묵 목사이고(1988년 소천) 어머니가 이상숙 권사이다. 두 사람은 정문호 목사(신용산교회)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하기까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약학대학 졸업 후 약국을 경영하면서 광주중앙교회 반주자로 봉사하던 전은애 양은 75년 처음 이전도사를 만나고 나서 걱정했다. “과연 나의 배필 감일까? 나보다 부모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녀에게는 목사 사모가 되어야 하는 사유가 있었다. 아버지 전목사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부친은 그 아들이 대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원해 미국 신학교에 유학까지 보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중도하차를 하여 부모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런 부모님을 보고 딸은 느낀 바가 있었다. “아버지, 제가 오빠 대신 목사와 결혼하겠어요. 그러면 주의 일이 이어지는게 아니겠어요.” 그녀의 부모는 이전도사를 본 순간 첫눈에 마음에 들었으며 딸을 시집 보내도 안심될 정도로 사윗감이 든든해 보였다. 이전도사 역시 평생 목회를 같이 할 배필을 찾던 중에 훌륭한 신부감이며 장래 사모가 될 전은애 양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80년 5월, 미국 필라델피아에 온 이용걸 목사는 이스턴칼리지를 졸업하고 이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서 미국에 왔던 이목사는 목회와 공부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는 공부를 하면서 영생장로교회를 개척하여 30여년동안 섬기고 있다.

전은애 사모는 , 나타내는 것을 싫어하며 숨어서 봉사하는 스타일이다. 수년 전 영생교회 교인이 1~2백 가정이었을 때는 교인 한사람 한사람, 그 자녀들 하나 하나 생일 때마다 사모가 일일이 손수 생일축하카드를 써서 부쳤었는데, 지금은 5백 가정이 넘어 그것을 예전처럼 할 수 없다며 몹시 아쉬워 한다.
전은애 사모는 이목사의 가장 충실한 비서이다. 교회의 역사, 기록, 문서, 책자, 신문, 설교 원고 등등을 모두 보관하고 있으며, 필요할 때 척척 찾아준다. 가정에 돌아와서는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가정 교육을 철저히 하고 자녀들이 어릴 때는 매일 저녁 자녀들과 가정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였다고 한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현수군과, 큰 딸 수인, 작은 딸 영인을 두고 있다. 막내 딸 영인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이용걸 목사는 한국 목회를 거쳐 이민목회를 하는 만큼 목회 경험이 풍부하지만 결코 경험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칼빈주의 입장에 서서 다음의 사항을 철저하게 실천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 인격으로 교인들을 지도하려고 노력한다.” 성도의 기본생활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것이 그의 목회철학이다.

• 주 일 성 수 (출 20:8-11)
• 매 일 성 경 (행 17:11)
• 매 일 기 도 (살전 5:17)
• 온전한 십일조 (말 3:7-10)
• 열 심 전 도 (행 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