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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가복음 3:5
“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 (마가복음 3:5)
서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하게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구약과 신약 곳곳에 드러난 그분의 감정에 대해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을 닮아 우리가 마주치는 다양한 상황 가운데 적절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전3:4-5,7).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너무 감정적으로 치닫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예수님처럼 충분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과 관련하여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삶을 살펴본다면 적절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론 :
-그리스도의 자비: 자신의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비로우셔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막 1:41, 마9:36, 마14:14, 마 20:34).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배고픔, 질병과 같이 육체적인 필요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은 육체의 배고픔을 채워주시기 전에, 먼저 영혼의 양식을 채워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그들을 여러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우리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노: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노결핍증’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의 앞에서도 의로운 분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불의 앞에서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경건한 것이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1-6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병자의 절박함에 그토록 몰인정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진노는 죄인들을 향해 보여주시는 자비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불의에 분노하지 않으면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쁨: 예수님께서 자기를 멸시하고 배척하는 세상에서 기쁨을 경험한 적이 있을까요?
성령과 동행하셨던 예수님은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분명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원천은 그의 백성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21에서 자신이 사탄을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임할 구원을 성부께서 “어린아이들에게” 계시하셨음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기쁨을 안긴 이 일은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알고 고난 중에도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히 12:2). 따라서 우리도 힘들고 어려운 삶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그 영광스러운 승리로 인해서 기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눈물: 예수님은 슬픔의 감정에 눈물로 반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던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예수님은 자신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실 이유가 없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심으로 우러나는 비통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과 슬픔을 함께하셨습니다(요11:33).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아시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고 우시며(눅 19:41)”.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그들이 당하게 될 고통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그 고통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거입니다.
토의 질문
1.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나 기쁨과 슬픔을 잘 표현하나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을 잘 표현하면 나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유익이 있는지 나눠 봅시다.
2. 예수님께서는 지금의 나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계실까요? 예수님께서 지금 나를 향해 가지는 그 감정에 대해 나의 솔직한 마음을 나눠보고 내가 격려 받거나 또는 바로잡아 야 할 것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결론: 예수님은 자기 감정을 감추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셨습니다.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잘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예수님의 감정은 언제나 완벽한 조화와 균형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셨지만 노하기를 더디하셨고 그 분노에 압도당하지 않고 통제하실 줄 알았습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시고 대가를 치르게 하셨지만 또한 용서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심으로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우리의 감정에도 이런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영생 교회 성도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마가복음 3:5
“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 (마가복음 3:5)
서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하게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구약과 신약 곳곳에 드러난 그분의 감정에 대해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을 닮아 우리가 마주치는 다양한 상황 가운데 적절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전3:4-5,7).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너무 감정적으로 치닫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예수님처럼 충분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과 관련하여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삶을 살펴본다면 적절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론 :
-그리스도의 자비: 자신의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비로우셔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막 1:41, 마9:36, 마14:14, 마 20:34).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배고픔, 질병과 같이 육체적인 필요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은 육체의 배고픔을 채워주시기 전에, 먼저 영혼의 양식을 채워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그들을 여러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우리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노: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노결핍증’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의 앞에서도 의로운 분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불의 앞에서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경건한 것이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1-6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병자의 절박함에 그토록 몰인정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진노는 죄인들을 향해 보여주시는 자비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불의에 분노하지 않으면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쁨: 예수님께서 자기를 멸시하고 배척하는 세상에서 기쁨을 경험한 적이 있을까요?
성령과 동행하셨던 예수님은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분명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원천은 그의 백성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21에서 자신이 사탄을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임할 구원을 성부께서 “어린아이들에게” 계시하셨음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기쁨을 안긴 이 일은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알고 고난 중에도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히 12:2). 따라서 우리도 힘들고 어려운 삶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그 영광스러운 승리로 인해서 기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눈물: 예수님은 슬픔의 감정에 눈물로 반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던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예수님은 자신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실 이유가 없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심으로 우러나는 비통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과 슬픔을 함께하셨습니다(요11:33).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아시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고 우시며(눅 19:41)”.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그들이 당하게 될 고통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그 고통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거입니다.
토의 질문
1.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나 기쁨과 슬픔을 잘 표현하나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을 잘 표현하면 나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유익이 있는지 나눠 봅시다.
2. 예수님께서는 지금의 나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계실까요? 예수님께서 지금 나를 향해 가지는 그 감정에 대해 나의 솔직한 마음을 나눠보고 내가 격려 받거나 또는 바로잡아 야 할 것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결론: 예수님은 자기 감정을 감추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셨습니다.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잘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예수님의 감정은 언제나 완벽한 조화와 균형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셨지만 노하기를 더디하셨고 그 분노에 압도당하지 않고 통제하실 줄 알았습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시고 대가를 치르게 하셨지만 또한 용서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심으로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우리의 감정에도 이런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영생 교회 성도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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